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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전에...
본 감상문은 『일본문학 번역 60년 현황과 분석』을 읽어본 적 없는 분 & 번역에 관심이 없는 분들에게는 다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포함되어있으니 잘 모르겠다 싶으신 분들은 살포시 뒤로가기를 눌러줍시다. 그냥 쓴게 아까워서 올리는거라서요
요약과 개인적 감상부분으로 나뉘어있습니다.
과제용 레포트로써 제출한 것이기 때문에 1장의 내용만 기술했습니다. 더 읽고 싶으시다면 책을 사시거나 도서관에 가세요
또한 본문부터는 존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참고바랍니다.
태클, 감상 환영합니다.
도서벨리에 올렸다가 뭔가 부끄러워서 내렸습니다 뭐하는거냐 난...
요약
본 책의 1장은 한국인들이 일본문학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여 왔는가에 대해 씌어져있다.
일본문학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 있어서 일본문학이라 함은 일본어로 씌어져 원문 혹은 번역의 형태로 한국인들에게 읽혀진 소설·시·평론 등 문학작품을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일본문학을 어떻게 읽어왔는가? 여러 문학작품들이 번역되었지만,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 지배 시대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독립적인 상품으로 유통된 예는 조승환이 번역한 불여귀(不如歸) 단 한편이라고 한다. 일제시대가 오히려 일본문학 번역의 공백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번역이 이루어지는 현장은 형식적이나마 언어와 언어, 나라와 나라간 문화적 권력관계를 동등한 위치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번역 없는 문화 수용은 종주국과 식민지 간의 문화적 권력의 차이를 비대칭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일본문학은 당시 문학자나 지식인들에게 외국문학으로 비춰지지는 않았다. ‘외국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아니다.’ 라고 대부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해결책을 외국문학에서 찾았었다. 즉, (조선문학-일본문학)-해외문학 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문학은 해방 직후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배일정책에 의해 표면에 나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4·19 혁명 이후, 대일 문화정책의 변화로 ‘민족적 감정을 배제하고 문화 교류의 차원에서 일본문학을 접해야 한다’ 라는 풍토와 함께 여러 작가들의 일본문학이 번역되어 출판되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식민 지배시절의 잔재의 영향 때문이라는 생각을 품고 차츰 일본문학을 윤리적인 관점에서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콤플렉스 아닌 콤플렉스 덕분에 맨 먼저 거부당하기 시작한 형식은 ‘사소설’이었는데, 사소설이 가장 ‘일본적인’ 표현 양식이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큰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번역은 언어와 언어, 나라와 나라간 문화적 권력관계를 동등한 위치로 이끌어준다. 다르게 말하면 번역은 단순히 다른 나라의 정보를 일방적으로 주입,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와 입맛에 맞게 바꾸어 전달하기 위함인 것이다. 본문에서는 선진문명으로부터 자국어와 자국문화를 지켜내는 방어벽의 역할을 한다고도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윤리적, 도덕적 잣대에 얼룩진 일본문학은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國)』 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에 의해 그 부정적인 관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일본문학은 한국문학의 정반대에 서 있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표피문화/정신문화, 비윤리성/윤리성과 같이 애써 이분법적으로 나눔으로 인해서 한국문학은 엄숙하고 교조적인 문학관을 낳게 되었고, 가장 대중적이라 할 수 있는 장르인 소설을 대중들로부터 떼어놓았다. 결국 읽을거리에 목말라 했던 평범한 독자들은 그 갈증을 일본문학으로 달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장편소설 『빙점(氷点)』이다. 1965년에 처음 출판된 『빙점』은 40년 동안 40번 이상이나 중복 출판되면서 한국소설과 외국소설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러한 독자들의 양상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일본문학, 특히 일본소설은 국내 출판계에서는 상업적 성공의 열쇠지만, 반대로 국내 문학계에서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문학은 대중에게만 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일본전후문제작품집』(1960)과 『세계문학전집』에는 다자이 오사무, 다니자키 준이치로, 요코미츠 리이치,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 오오카 쇼헤이 등 당시 일본 대표작가의 소설이 실려 있었고, 소설가 김승옥도 소설을 쓰게 된 동기를 이러한 일본소설에서 찾았다고 했다. 이것은 해방 이후에도 한국문학계는 일본문학과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적어도 비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자극원이거나 참조항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 이후, 일본문학에 대한 관심과 지위는 1989년,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쓴 『상실의 시대』(원제-ノルウェイの森) 가 출판되면서 크게 올라갔다. 하루키 붐의 가장 큰 특징은 20대 젊은 독자들을 일본문학의 충성스런 독자층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우라 아야코가 기독교라는 대중성이 강한 소재를 사용해 독자층이 광범위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9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의 사회·문화적 현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이 이후 한국문단이 침체와 영미·프랑스·독일 소설이 퇴보하면서 일본소설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이 추세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개인적 감상
이 글에서 신기했던 부분은 일제시대에 오히려 일본문학이 번역된 일이 가장 적었다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신기한 한편으로 일본입장에선 한글을 말살하고자 하는 의도로 번역을 최대한 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제에서 ‘독립’한 우리나라는, 일본의 잔재가 남아있는 모든 것들에서 ‘독립’하려 했다. 일본이 자동차 운전석을 우측으로 했다면, 우리나라는 그것을 좌측으로 했다. 일본이 홍백전을 할 때 우리나라는 청백전을 했다. 이런 세세한 것부터 독립하려 발버둥 친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일본문학은 한국문학이 독립해야 할 하나의 ‘필요악’이었고, 부정적으로 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앞 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적, 이분법적 독립을 부르짖은 한국문학은 가장 영향력 있는 심판자인 ‘독자’에게 외면받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문학 열풍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결국 문학자나 지식인이 아닌 독자였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윤상인의 주장대로 번역을 한다는 건 그 나라의 문화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문학에만 편중된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이든 싫다고 무조건 거부하는 자세보다는 받아들일 부분은 받아들이는 넒은 자세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가 일본문학에 대해서 좀 더 넒은 마음으로 관대하게 대처했었다면 이만큼 한국문학이 죽어가고 일본문학이 팽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한국인에게 일본문학이란 무엇이었던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국인에게 일본문학이란 우리가 그토록 거부하고 막아왔던 일본문화 전체에 대한 반증 중 하나라고. 그러니 이런 일본문화를 우리나라에 알리는 방법 중 하나인 번역에 대한 책임이 막중하다고 느꼈다. 덕분에 번역의 진정한 의의에 대해, 앞으로 번역가가 된다면 어떤 의식을 가지고 번역에 임해야 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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